“개교50돌 이제 공영대학 변신”
[속보, 생활/문화] 2004년 02월 25일 (수) 22:45




[한겨레] 지난 1954년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200명의 학생으로 출발한 한국외국어대학교가 오는 4월 ‘반백년’을 맞는다. 마침 다음달초에는 6년 동안의 관선이사 체제도 벗어날 것으로 보인다. 겹경사인 셈이다.
동면하듯 움츠리고 지냈던 학내 구성원들은 “재도약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며 머리를 맞댔다. 최초의 영어대학(단과대) 설치, 영어전용 기숙사 신축, 사이버 외대 설치, 부속 외국어고 설립 등은 그 결과물이다. ‘외국어교육의 메카’라는 명성이 거저 얻은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그 앞머리에 안병만(63) 총장이 있다.

-50돌을 축하한다. 그런데 재단 비리 때문에 지금도 임시이사(관선이사) 체제다.

=며칠만 있으면 정이사 체제로 바뀔 것이다. 교육부도 승인했고 교수·교직원·학생·재단이 합의했다. 지금 어느 분이 정이사로 합당할까 학내 구성원들과 논의 중이다. 거의 선출을 끝냈다. 6년 만에 관선딱지를 떼는 것이다.

-정이사 체제에서 이사진은 어떻게 되나 =‘오너’가 있던 대학에서 일종의 ‘공영대학’으로 바뀌는 것이라고 보면 맞다. 이사진은 교육부 추천 3명, 학내 구성원 추천 3명, 기존 재단 추천 1명, 총장, 동문회장 등 9명이다. 재단이 기득권을 포기해준 셈이다. 학내 구성원들이 동일한 목표를 승인하고 달려나가다보니 정말 활력이 느껴진다. 이제 외대는 ‘뜰’ 것이다.

-동일한 목표라는 게 뭔가. 옛날에 비해 외대가 많이 ‘처졌다’는 평가가 많은데 재도약을 위한 정책 목표나 비전을 말하나.

=지난 6년 동안 학내분규와 관선이사 시절을 겪으면서 구성원들이 합의한 교육 지향점이 있다. 민족주의를 발판으로 삼되 배타적이지 않고 국제주의를 지향하되 사대적이지 말자는 것이다. 우린 그것을 ‘뿌리가 있는 세계화’라고 부른다. 외대의 임무(미션)이기도 하다. 학교의 자원, 정책, 계획을 이제 그 방향으로 집중하고 있다.

-좀 막연하다. 우수한 신입생을 끌어들일 구체적 유인책이나 기업·사회가 외대를 새로 보게 할 그런 계획이 있어야 하지 않나.

=크게 두가지다. 먼저 ‘동북아 중심국가’의 인재를 외대가 공급하는 것이다. 그게 올해 개설한 동북아학부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를 모두 구사하는 인력 양성이 목표다. 물론 영어는 기본이다. 이들은 아시아지역에서 ‘국경없이’ 비즈니스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기업들이 눈독을 들일 만한 인력을 배출하겠다.

두번째는 한 나라의 자존심·경쟁력과 관련된 것인데, 현지어를 아무도 몰라 영어로 된 2차 정보에 접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막자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우리나라는 언론이든 정부든 언어를 몰라 철저하게 영어권이 제공하는 2차 정보에 만족해야 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올해 일단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5개국 언어를 다루는 중앙아시아학부와 서양언어 발상지인 그리스·발칸학부를 신설했다. 앞으로도 해마다 5개 정도의 희귀어 과정을 개설할 방침이다.

‘재단비리 얼룩’관선이사 체제 벗고 새출발
‘뿌리있는 세계화’학교자원·정책 집중
부속 외고 박사교사 배치 ‘진짜 외고’실험
-학부 신설이 쉽지 않았을텐데. 더구나 ‘돈 되는’ 학부도 아닌 것 같다.

=그렇지 않다. 카자흐스탄의 석유매장량은 세계 최고라는 게 정설이다. 그렇다면 외대의 이런 노력에 가장 고마워해야 할 곳은 정부다. 그런데 증원도 안해준다. 지원금도 없다. 특성화자금을 신청하면 “외대가 외국어 가르치는 것이 뭐가 특성화냐”란 대답이 나온다. 그래서 제살깎아먹기식으로 다른 학부 정원 줄이고 동문들의 재정 도움 받아가며 일했다. 정말 답답하다. 정부 차원의 관심이 필요하다. 사실 이런 희귀언어 학부와 아시아에서 독보적 수준의 통역번역대학원은 국가의 자산 아닌가.

-며칠 전에 영어전용 기숙사 기공식을 했다고 들었다. 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먹고 자고 배우는 ‘보딩스쿨’ 개념을 도입하기 위해서라는데 꼭 그런 것이 필요한가.

=외국어는 학습이 아니라 생활이다. 그래서 보딩스쿨이 외국에는 보편화돼있다. 내년부터 우리 대학에 입학하는 신입생은 6~12개월 동안 의무적으로 이 기숙사에서 생활할 각오를 해야 한다. 물론 기숙사 관리인원은 모두 원어민으로 채용하고 기숙사에서는 24시간 영어로만 말해야 한다. 그러면 영어 정도는 1학년 때 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초중고교 사교육에 묻혀서 그렇지 대학생 사교육비도 만만치 않다. 그 대부분이 영어 학습인데 우린 그걸 학교에서 해주겠다는 것이다.

-국내 대학 처음으로 올해 교육부에서 영어 단과대학 승인을 받았는데, 다른 대학 어문계열에 비해 굳이 덩치를 키울 필요성이 있나.

=대학 덩치를 키우자는 게 아니다. 영어, 영미 문학, 영미 지역학, 통·번역을 모두 담당하는 인력을 양성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중국의 베이징외대는 한해에 족히 1억권의 영어책을 전국에 공급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특히 초등·유치원 단계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교재와 교사가 판을 치고 있다.

-국제교류는 어떤가. 위성방송 실시간 시스템이 최첨단이던데.

=67개 전공의 학생들이 150여개 외국대학과 교류를 맺고 있다. 각국의 위성방송을 실시간으로 수신할 수 있는 장치는 우리 대학 자랑거리다.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언어도 제대로 습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외대에 유학온 외국 학생도 1천명이 넘는다. 교육수지 역조를 조금이나마 완화하는 것이니만큼 이것도 사실 정부가 고마워해야 한다. 얼마 전에는 국제교류과도 만들었다. 책임자는 미국인으로 뽑았다.

-얼마 전엔 신입생 지역할당제를 도입한다고 발표했다. 지방 학생들이 관심이 많을 것 같다.

=지방엔 우수한 학생이 많다. 대학은 지역간·계층간 다양성을 추구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2005학년도, 즉 올해 뽑는 신입생 가운데 일정 비율은 지역할당제로 뽑을 것이다. 서울대의 지역균형선발제와 비슷한 개념이며 곧 서울대와 합동 입시설명회를 열기로 정운찬 서울대 총장과 합의했다.

-올해 다른 대학보다 뒤늦게 사이버외대를 개설한다는데, 차별화 전략은 있나.

=5개 학과 1000명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가장 큰 특징은 학생들이 외대에서 수강할 수도 있는, 곧 국내 처음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결합한 사이버 대학이라는 점이다. 특히 각 과의 교수들이 다른 과 학생으로 등록했다. 학생 처지를 경험하기 위한 것이다. 이 정도면 ‘잘 가르칠 준비’가 돼 있는 것 아닌가.

-최근 특목고 특히 외국어고가 사교육시장의 팽창을 주도한다 하여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는데, 올 가을 신입생을 뽑는 외대 부속 외국어고등학교는 어떻게 운영할 계획인가.

=기존 외고처럼 의대·법대진학반 등의 치졸한 편법은 아예 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학생의 20%는 ‘국제반’이다. 이들의 목표는 해외 유수 대학 진학이다. 우리는 외고생과 외대생들을 ‘세계를 감지하는 촉수’로 길러낼 것이다.

이를 위해 외고 교사진을 모두 박사급으로 채용하기로 했다. 전교생은 3년 동안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기숙사에서는 24시간 영어를 사용해야 한다. 교장도 미국에서 공모를 통해 뽑을 예정이며 기숙사 관리인은 물론 식당과 매점 직원까지 영어권 원어민을 채용할 예정이다. 외대 수준의 최첨단 어학실습장비, 각국 위성방송 청취실, 디지털 도서관, 멀티미디어 교육용 강의실 등 시설도 자랑거리다.

황순구 기자 hsg1595@hani.co.kr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